<인셉션> <인터스텔라> 등 과학을 환상처럼. 환상을 과학처럼 보여주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이 개봉했습니다.
영화 <테넷> 입니다.
<테넷>은 언뜻보면 그동안 SF영화에서 흔하게 사용되었던 '시간여행'과 '평행우주'와 비슷한 것 같지만. 다릅니다. 그래서 더 새롭죠.
<테넷>의 주제는 정확히 말하면 '시간역순'입니다. 줄거리 자체가 '오페라 극장 테러사건'을 기점으로 '시간순'으로 한 번 진행되고 '시간역순'으로 한 번 더 진행되죠. (1.오페라 극장 테러사건과 2.스탈스크-12 전투, 3.캣과 사토르의 베트남 요트 휴가. 이 세가지 사건은 전부 동시에 일어난 일입니다. 공간은 다르지만)
이 역순은 영화 곳곳에 녹아들어 있어요. 하나씩 볼까요?
1. 영화 제목 "TENET"
우선 영화 제목인 "TENET"은 좌우반전입니다. 똑바로 읽어도 TENET. 역순으로 읽어도 TENET이죠. 숫자 10(TEN)을 도치시킨 것이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인버전을 할때 계속해서 시간을 보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특히 스탈스크-12에서의 전투장면에서는 10분을 손목시계로 맞춰놓고 레드팀은 시간순으로, 블루팀은 시간역순으로 전투를 합니다.
2. 인버전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인 '인버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버전(Inversion)은 '도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시간여행'과는 명확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보편적인 시간여행 영화는 이렇겠죠. 주인공이 총에 맞습니다. 그럼 과거로 돌아가 주인공이 총에 맞지 않도록 과거를 바꾸겠죠. 하지만 <테넷>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거꾸로 갈 뿐, 총에 안맞을 순 없습니다. (실제로 역순진행될때 아직 총에 맞지 않았는데도, 시간이 다가오면 먼저 피가 흐르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 중 하나가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인 것 처럼 말입니다.
3. '산제이 싱' 저택 잠입 장면
<테넷>은 영화 자체가 완벽한 대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장면 곳곳에서도 볼 수 있어요. 예를들어 인도 무기거래상인 '산제이 싱'의 저택에 침입하는 장면에도 도치가 돋보입니다. 닐과 주인공은 경비가 삼엄한 산제이싱의 자택에 숨어 들어가기 위해 '번지점프' 작전을 세우죠. 들어갈 때는 와이어 반동을 통해 저택으로 '끌려 들어가듯이' 들어가고. 나갈때는 와이어에 매달려 뛰어내리는 작전입니다. '인버전'하는 과정과 묘하게 비슷한 장면입니다.
이때 대사가 뭔지 기억 나시나요? 주인공이 "10분이면 돼"라고 말하자 닐이 이렇게 말합니다. "시간은 상관없어. 살아서 나오는 게 중요한 거지" 이 대사는 후에 회전문을 통해 자기자신을 인버전 하게될 상황을 암시(묘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4. 역사는 반복된다
<테넷>은 다양한 국가(우크라이나, 영국, 미국, 러시아-소련, 베트남 등)와 시간(과거-현재-미래)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어요. 바로 '핵'과 '냉전'입니다. 네이버에서는 영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더군요.
"시간의 흐름을 뒤집는 인버전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세상을 파괴하려는 사토르(케네스 브래너)를 막기 위해 투입된 작전의 주도자(존 데이비드 워싱턴). 인버전에 대한 정보를 가진 닐(로버트 패틴슨)과 미술품 감정사이자 사토르에 대한 복수심이 가득한 그의 아내 캣(엘리자베스 데비키)과 협력해 미래의 공격에 맞서 제3차 세계대전을 막아야 한다!"
인류는 이미 핵전쟁이라는 뼈아픈 과거를 갖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이 과거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죠.
'맨해튼 프로젝트'와 '오펜하이머'
맨해튼 프로젝트는 세계 2차대전 당시 미국, 영국, 캐나다가 공동참여한 '핵폭탄 개발 프로그램'입니다. 이때 핵폭탄을 만든 사람이 바로 '오펜하이머'라는 과학자예요. 오펜하이머는 핵폭탄을 개발하긴 했지만, 실제로 핵폭탄이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된 것을 보고는 핵폭탄 사용에 반대합니다. 이때문에 공직에서 쫒겨나죠.
<테넷>은 미래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는 가정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인류가 핵폭탄을 개발했던 것 처럼. 미래에는 '인버전'을 개발한 거죠(인버전은 '핵분열의 역복사'를 통해 가능합니다). 그리고 인버전을 발명한 미래의 과학자는 오펜하이머처럼 이를 후회합니다. 그래서 알고리즘을 9개의 핵보유국이 나눠서 보관하도록 한 후 자살했다는 가정입니다.
그리고 현재는 어떤 모습인가요.
지금도 핵개발은 계속 되고 있죠. 핵은 '보호'라는 이름으로. 혹은 '힘의 균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지만, 결국엔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개발됩니다. 누군가와 싸우기 위해 무기를 갖추는 것 처럼. 핵은 사용하고 있지 않더라도, 누군가 보유하고 있는 이상 냉전이나 다름없습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싸움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전체적인 주제가 "지구라는 자원을 둘러싼 과거과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테넷>은 미래가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는 설정입니다. 미래는 왜 우리를 공격할까요? 이것은 영화의 주인공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플루토늄을 사토르에게 빼앗긴 뒤 주인공은 다시 프리야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물어보죠. "미래가 왜 우리를 공격해요?" 사토르는 그걸 알아내는 게 너의 임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영화 막바지에 사토르의 입을 통해 진실이 밝혀지죠. 미래가 우리를 공격하는 이유는 "해수면이 상승하고 강이 메말랐기 때문"입니다.
바로 기후위기입니다.
인간은 기술발전을 통해 삶의 윤택함을 얻었지만, 동시에 그만큼 환경도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사실 몇십년 전부터 경고는 있었지만) 그 대가가 우리 눈 앞에 다가오고 있죠. 어디에선 폭염과 가뭄으로 사람이 죽고, 어디에선 홍수로 사람이 죽습니다. 우리나라도 지금 기록에 가까운 폭염과, 끝나지 않는 장마로 인한 홍수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코로나도 기후위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죠. 인간이 너무 많은 삼림을 베어내서 그만큼 야생동물과 인간의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코로나의 시작은 박쥐였던 것 기억나시죠?
과학자들은 지구의 온도가 1.5도를 넘기는 '티핑포인트'를 넘기면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온다고 경고해 왔습니다. 그래서 위기감을 느낀 세계 각국이 2015년 '파리기후협정'이라는 약속을 하기도 하고, 얼마전(2018년) 한국 인천 송도에서는 <지구온난화 1.5도 특별보고서>가 채택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약속은 깨지기도 하죠. 트럼프 미국대통령이 파리기후협정을 탈퇴한 것 처럼요. 이런 내용 역시 영화에 들어가 있습니다. 프리야가 말하죠. "약속이 무슨 소용이야?" (이에 대답이라도 하듯 영화의 마지막은 약속을 어긴 프리야를 응징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런 대사도 나옵니다. "그건 우리 책임이니까." 책임. 기후위기담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기후위기는 원인유발자와 책임부담자가 다릅니다. 환경을 가장 많이 파괴한 것은 지금 우리 세대지만, 그 책임은 미래세대가 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누리는 윤택함은 미래세대에게 '빌려'온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죠.
물, 땅, 공기 등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을 대가 없이 빌려주고싶은 사람이 어디있을까요? 그래서 <테넷>의 미래세대는 "세계 자체를 인버전"하고자 합니다. 닐의 말처럼 시간 순서상 현재는 언제나 우세합니다. 하지만 역복사를 통해 미래가 더 우세하도록 바꾸는 것이죠. 사토르가 한 말 기억 나시나요? "지금 우리를 비추는 햇살은 미래세대를 비추게 될거야"
정말 무섭지 않나요?
등장인물과 우리의 관계성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영화의 캐릭터들이 영화 밖 우리들과 참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씩 볼까요?
1. 안드레이 사토르-과거세대의 대표자
사토르. 영화의 악역이죠. 그는 과거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토르는 구소련인입니다. 구소련 도시였던 스탈스크-12에서 플루토늄을 발견하고. 이때부터 무기밀매를 통해 돈을 벌어왔습니다. 러시아에 미움을 산 이후 영국귀족인 '캣'과의 결혼을 통해 영국국적을 취득했고. 지금도 양쪽으로 거래를 하면서 거금을 벌고 있습니다.
사토르를 설명하는 대사는 이거죠.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아무도 못가져."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캣에게 한 말입니다. 왜 사토르는 그렇게 캣에게 집착할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캣은 사토르와 정 반대의 인물입니다. 영국 귀족이라는 명예로운 신분에 감정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죠. 프리포트라는 편법을 사용하긴 하지만 '합법적'인 일만 합니다. 이에 반해 사토르는 돈은 많지만 명예도 존경도 받지 못합니다. 직업도 온통 불법으로 가득차 있죠. 이런 위치는 둘의 옷차림에서도 나타나요. 부부임에도 불구하고 캣은 언제나 명품. 말끔한 정장을 입고 나타나고요. 사토르는 거의 항상 편한 복장을 하고 나오죠.
좀 다른 시각으로 볼까요?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아무도 못가져"는 기후위기를 바라보는 일부 기성세대의 시선이기도 합니다. 사토르에게 미래는 쓸모가 없습니다. 그는 췌장암으로 어차피 죽을날을 받아 놨어요. 어차피 죽을거 현재에서 온갖 나쁜짓을 하면서 호화로움을 누리죠. 요트 장면이 그렇게 많이 등장하는 것도 이를 부각하기 위해서 인듯 합니다. 앞으로 살 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까운 기성세대는 미래의 누군가를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싶지 않겠죠.
2. 캣
캣은 좀 더 복잡합니다. 아들이 어떻게 되든 신경안쓰는 사토르와 달리. 캣은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눈 앞에서 보고 싶지 않아"합니다. 자신과 가치관이 다른 사토르를 떠나고 싶어 하지만, 많은 것이 묶여 있어 오랫동안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를 묶고 있는 것은 협박과 폭력이지만 어쩌면 요트, 옷, 자동차 등으로 표현되는 윤택한 삶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절망을 벗어던지고 직접 사토르를 죽인 후 자유를 쟁취합니다.
3. 닐
알고보니 영화의 아주 중심인물이었죠. 닐은 과거에서도 현재에서도 주인공을 살리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요. 마지막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요. 오페라 극장에서도, 스탈스크-12에서도 자신 대신 총에 맞은 사람(가방의 빨간 끈 표시)이 닐이라는 걸 알게된 순간 주인공이 물어보죠. "다른 방법은 없을까?" 닐이 죽지 않는 방법은 없을 거냐는 뜻이죠. 하지만 닐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그런 방법은 없을 거라는 뜻이에요. 주인공은 그럼 그건 운명이냐고 물어봅니다. 하지만 닐은 그게 '현실'이라고 대답하죠. 이건 무슨 뜻일까요?
중간에 닐이 설명했던 "할아버지의 역설" 기억 나시나요? '우리는 그들(미래 세대)의 조상인데 왜 우리를 죽이려고 하냐'는 주인공의 질문에 닐은 다음과 같이 말하죠. 미래세대는 우리가 죽어도 자신들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한다고. 그게 가능하냐는 물음에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그렇게 '믿는다'는 것이라고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처음 들었을 때 '체념'처럼 들립니다. 미래는 어차피 정해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없다고요. 하지만 닐은 이 말은 그런 "방임"이 아니라고 합니다. 미래는 이렇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믿음 즉, 자신이 원하는 미래는 이루어 내면 이룰 수 있다는 뜻이죠.
이 뜻은 주인공과도 큰 상관이 있습니다.
4. 주인공
<테넷>의 주인공은 작중에서 한 번도 이름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엔딩 크레딧에서 Protagonist라고 나오는데, 영어로 그냥 주인공입니다. 자막에서는 주도자라고 하더라고요. 주인공인데 왜 이름이 없을까요?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그럼 왜 주인공이야..) 제 생각에 주인공은 영화를 보는 우리 모두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주인공은 알게 됩니다. 미래에 테넷을 세우는 것도 본인이고, 닐과 프리야도 자신을 위해 일한다는 것을요.
마지막 독백이 기억에 남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발사된 총알과 터져버린 폭발물에만 관심을 가진다. 하지만 진짜 세상을 바꾸고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터지지 않은 폭탄과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과 불발탄이다."
미래를 바꾸는 주인공 즉 주도자는 현실에 사는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자기개발서에나 나올 말을 물리학(과학)을 통해 해 낸 것이 이 영화의 포인트가 아닐까 싶네요.